2019.12.0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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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 산책로가 생겼다. 여러 구(區)에 걸친 드넓은 공간으로, 밤낮으로 많은 이들이 찾는 아름다운 곳이다. 나 역시 가끔 늦은 밤에라도 부족한 운동량을 채울 겸, 복잡한 생각들을 자연 속에서 정리할 겸 산책을 나섰었는데, 그날도 그런 밤이었다. 반려동물이나 가족과 산책하는 사람들, 가볍게 운동하는 주민 등 일상의 풍경 사이로 갑자기 이질감이 느껴졌다. 전공이 소아청소년이라 노인분들을 대할 일이 적어 무어라 딱 떠오르진 않았지만, 단정한 차림의 한 할머니가 시선을 끌었다. 미묘하게 흔들리는 걸음걸이, 공기가 서늘한 밤이건만 얼마 동안이나 걸었는지 상기되고 지친 안색이 완연했다. 할머니는 나에게 좀 엉뚱한 지명의 길을 물었고, 나는 방향을 알려드리고 그 불안한 눈빛과 걸음이 걱정되어 약간의 거리를 두고 그분을 따라갔다. 할머니는 잠시 뒤 만난 한 가족에게 또 길을 물었다. 나와 시선을 교환한 그 가족은 함께 할머니를 안심시켜 드린 뒤 경찰을 불렀다. 전화기 너머 ‘치매’라는 단어가 들렸다.

공간이 심리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신경건축학(Neuroarchitecture)이란 학문이 있다. 이에 대한 책 ‘공간이 마음을 살린다’의 저자 에스더 스턴버그는 인간에게는 단순한 공간의 개념을 떠나 심리적인 영향을 고려한 건축이 필요하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실용성만 강조된 비인간적인 구조, 의료기기 소음으로 둘러싸인 단조로운 병원의 건축 구조가 환자의 인지능력과 심리뿐 아니라 심지어 질병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은 노년기 인구가 급격히 늘고 있는 우리 사회도 이제 보여주기 위한 것보다는 인간의 마음을 위하는 건축이 절실하다는 것이었다. 가족과 연결된 뒤 연신 감사의 말을 반복하던 할머니의 표정이 잔상이 되어, 돌아오는 내내 그전에는 좋게만 보이던 길이 불편했다. 어디에도 위치 설명이 없고, 안내판이 드문 데다 밤에는 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할머니에게는 갑자기 생긴 이 산책로가 얼마나 깊고 깊은 산 속 같았을까.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공간들 속에서, 우리 모두는 결국 이런 출구 없는 산책로에서 길을 잃게 되는 것은 아닐까.

배승민 의사·교수